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문단 편집) === [[프로이센군]] 기반 양성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키는 약 160cm로 [* 삼시세끼를 전부 고칼로리인 전투 식량으로 먹고, 술도 좋아해서 매일 마신 탓에 체형은 무려 100kg가 넘었다고 한다. 실제로 위의 초상화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45세인 1733년에 그린 건데, 초상화를 잘 살펴보면 갑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심한 비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키가 큰 병사들을 모아 척탄근위연대를 창설했는데, 신장이 6피트(약 182cm) 이상인 사람만 뽑았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연대는 "포츠담의 거인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하며, 당시 인구가 이백만 정도 되는 프로이센에서는 충분한 수를 모집하지 못해 유럽 전역에서[* 거인 연대의 국적 비중에서 가장 높았던 국가는 스웨덴이었다고 한다.] 고용했고, 가끔은 주변 국가의 왕들이 선물해주는 일도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1세|표트르 대제]]가 주기적으로 보내줬다고 하며, [[오스만 제국]]에서도 보내줬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2세도 왕세자 시절 아버지 선물로 영국에서 키가 198cm인 청년을 고용해 왔는데, 이때 지불한 금액이 군마 20마리어치의 값이었다고 전해진다. 비약이 있지만 비교하자면 [[소형전술차량]] 20대를 도입할 돈으로 키 큰 청년 하나를 데려온 격이다. 외국인들을 고용해 오거나 선물 받아온 것으로도 부족하자, 심지어 [[프레스 갱|납치까지 벌였다]].[* 납치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었는데 이유가 부하들이 납치하면서 가두는 상자에다가 숨구멍을 뚫는것을 잊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부하들은 제대로 화가 난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한테 전부 태형을 선고받아 두들겨맞았지만.] [[아일랜드]] 출신의 제임스 커클랜드([[https://en.wikipedia.org/wiki/James_Kirkland_(Irish_giant)|James Kirkland]])라는 청년은 키가 213cm였는데, 어느 날 런던에서 프로이센 대사인 보크에게 하인 고용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이것이 함정으로 그는 [[포츠머스]]에서 프로이센 배에 탔다가 그대로 프로이센까지 끌려갔다. 이 납치극에 쓴 돈이 대략 1천 파운드라고. 그래도 커클랜드는 거인 연대에서도 키가 손꼽히게 컸다고 하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인 연대에서 가장 키가 큰 병사는 따로 있었으니, [[노르웨이]] 출신의 요나스 에릭손으로 무려 268cm의 초거구였다! 출처: 도감 무기 갑옷 투구/ 이치카와 사다하루 저/ 남지연 역/ AK(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 363쪽]. 또 오스트리아 외교관 한 명도 키가 크다는 이유로 공공 마차를 타던 중 하노버에서 프로이센까지 끌려왔다가 외교관임을 밝히고 풀려나기도 했다. 이 외교관은 이 피랍 경험담을 평생 동안 이야기거리로 잘 써먹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이런 납치극은 피해자가 속한 국가들의 불만을 샀다. 아예 전담 모집관까지 둬서 일부는 프로이센을 돌아다니며 키 큰 청년들을 찾아 징집하고, 일부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키 큰 청년들을 납치해 왔다고. 거기다 프로이센 내에서 신생아때부터 찍었던 건지, 신생아가 평균치보다 조금이라도 더 크면 붉은 스카프로 표시해 뒀다고 한다. 물론 부모들은 아이가 평균보다 조금이라도 큰 것 같으면 숨기느라 난리였다. 이걸로도 부족해 스스로 만들어낼 생각까지 품었는지 거인병들을 키가 큰 여자들과 결혼시켜 아이를 낳게 했는데, 이 방법은 너무 느렸고 종종 평범한 키의 아이들도 태어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실망시켰다고 한다. 이 사례는 찰스 다윈이 자신의 저서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가축 말고 사람을 특정한 특징을 뽑아내기 위해서 강제로 교배시키는 사례는 그 유명한 포츠담의 거인들 말고는 없다'''라는 식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숫자는 대략 2천 5백~3천여 명 정도였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막상 만들고 나니 함부로 쓰기 아까웠는지, 창설 이래 단 한번도 실전에 투입시키지 않았다. 특히 이들은 전투 대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보고 싶을 때나 외국 사절 같은 손님들이 왔을 때 열리는 사열식이나 퍼레이드 같은 의전에만 사용되는 등 사실상 [[의장대]]였다. 그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기분이 안좋으면 2~3백 명 정도를 모아서 북치고 장구치고 나팔을 불게 하면서 함성을 내지르는 등의 간략한 퍼레이드를 벌이게 했다고 한다. 프랑스 대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지만, 키 큰 병사들이야 말로 나의 약점이오."라는 말도 했다고 하며, 1740년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신하들이 거인 연대 병사 수백 명을 데려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병실 앞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게 하자 다 죽어가는 몸으로도 크게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아끼는 거인 연대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폭력으로부터 예외는 아니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이들에게 다른 병사들에 비해 더 좋은 장비와 음식, 숙소를 지급했으나, 본인이 직접 나서서 가혹한 훈련과 체벌을 주도한 탓에 자살 및 탈영 비율이 타 부대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좋은 숙소에 살게 하고 밥과 장비를 제대로 챙겨준들 매일같이 고된 훈련과 폭력에 시달리고, 심지어 일부는 뭣도 모르고 강제로 끌려온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사후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인원이 지속적으로 타 부대로 차출되면서 연대는 점진적 해체 수순을 밟았고 1806년 완전히 해체되었다고 한다. 실전용 보다는 피규어 수집의 성격이 더 강했던 거인 연대와는 별개로 우월한 교환비 탓에 인간 믹서기로 묘사되는 프로이센 군의 기틀을 잡은 것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였다. 그의 치세에 많은 군제 개혁이 시작되었는데 그중에는 징병제 실시, 쇠 꼬질대 도입[* 덕분에 프로이센 병사들은 장전 중에 꼬질대가 부러지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분당 6회 사격[* 실제로 분당 6회 사격이 가능했다기 보다는 그정도로 열심히 훈련을 시켰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여담으로 당시 타국에서는 분당 3회 발사가 표준이었다.], [[거위걸음]]으로 대표되는 구보 도입으로 인한 기동력 상승 등 군의 질을 고루 향상시키는 개혁들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